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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준, 「돌다리」 창섭은 의사이다. 하나뿐인 누이를 의사의 오진으로 잃고 창섭은 의전(醫專)에 들어갔다. 맹장염으로 죽은 누이를 기리는 마음으로 그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 결과 맹장 수술로는 서울서도 정평이 있는 의사가 되었다. 이름이 나자 자연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졌다. 병원 규모를 늘리려니 돈이 필요하다. 창섭은 고향 땅을 생각한다. 고향에서는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창섭의 아버지는 근검으로 근방에 소문난 영감이다. 아버지는 선대(先代)가 물려준 땅의 소중함을 잘 아는 사람이다. 하긴 농사를 지으며 땅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농부가 어디에 있을까? 땅을 팔아 병원을 키우려는 창섭의 생각은 처음부터 땅을 가치로 평가하지 않는 아버지 생각과 부딪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고향마을인 샘말로 들어선 창섭은 동구에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돌다리를 고치는 아버지를 본다. 동네 사람 수십 명이 다릿돌을 동아줄에 얽어 끌어올리고 있다. 동네 복판을 흐르는 개울에는 서너 군데 징검다리가 있지만 하룻밤 비에도 곧잘 넘치어 사람들은 큰 돌다리로 통행을 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 창섭에게 돌다리의 내력을 들려주곤 했다. “너희 증조부님 돌아가시어서다. 산소에 상돌을 해 오시는데 징검다리로야 건너올 수가 있니? 그래 너희 조부님께서 다리부터 이렇게 넓구 튼튼한 돌루 노신 거란다.” 돌다리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추억이 담겨 있다. 고향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는 곳. 돌다리는 두께가 한 자는 실히 되고 폭이 여섯 자, 길이는 열 자가 넘는 자연석 그대로라 몇 사람의 힘으로는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크다. 수십 보 이내로 면(面)의 보조를 얻어 난간까지 달린 나무다리가 보인다. 나무다리가 있는데도 왜 이리 힘들게 돌다리를 고치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는 창섭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차근차근 땅을 팔아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외아들인 자기가 부모님을 모시려면 부모님이 농토를 버리시고 서울로 오는 게 순리라는 말로 아들은 입을 연다. 분위기를 띄운 후 아들은 병원 사정을 말한다. 환자는 많아지는데 입원실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 교통 편한 자리에 삼층 양옥이 나왔는데, 원래 인쇄소였던 자리라 입원실로 바꾸기 쉽다는 것, 시골에 땅을 둔대야 고작 삼천 원의 실리가 떨어질지 말지 하지만, 병원을 확장하면 일 년에 만 원 하나씩은 이익을 뽑을 자신이 있다는 것, 돈만 있으면 이담에라도 얼마든지 좋은 땅을 살 수 있다는 것. 한마디로 아들은 땅을 교환가치로 판단한다. 땅주인이 사고팔 수 있는 물건 말이다. 아버지는 대답을 미룬다. 점심을 먹다가 아버지는 또 돌다리 이야기를 한다. 나무다리가 있는데 돌다리는 왜 고치느냐는 창섭의 말에 아버지는 대뜸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두 그런 소릴 허는구나. 나무가 돌만 하다든? 넌 그 다리서 고기 잡던 생각두 안 나니? 서울로 공부 갈 때 그 다리 건너서 떠나던 생각 안 나니? 시쳇 사람들은 모두 인정이란 게 사람헌테만 쓰는 건 줄 알드라! 내 할아버지 산소에 상돌을 그 다리로 건네다 모셨구 그 다리루 글 읽으러 댕겼다. 어머두 그 다리루 가말 타구 내 집에 왔어. 나 죽건 그 다리루 건네다 묻어라……난 서울 갈 생각 없다.” 아버지에게 돌다리는 추억이 서린 사물이다. 돌다리에서 아버지는 정(情)을 느낀다. 사람들만 정을 느끼는 게 아니다. 무생물도 정을 느낀다. 말도 안 된다고?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한 물건에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의 선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그 물건을 어떻게 함부로 하겠는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서도 차마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물건을 버리면 그 안에 서린 추억까지 버리는 것 같으니까. 아버지는 지금 돌다리에서 이런 마음을 느낀다. 나무다리로도 개울을 건널 수 있다. 하지만 나무다리에는 돌다리에 얽힌 추억이 없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들의 추억이 돌다리에 듬뿍 묻어 있는데, 어떻게 돌다리를 버리란 말인가. 돌다리를 버리는 건 살아온 세월을 버리는 것이다. 살아온 세월을 버리면 지금 아버지에게는 무엇이 남게 될까 아버지는 땅도 이렇게 생각한다. “느르지논 둑에 선 느티나문 할아버님께서 심으신 거구, 저 사랑 마당엣 은행나무는 아버님께서 심으신 거다. 그 나무 밑에를 설 때마다 나는 그 어른들 동상(銅像)이나 다름없이 경건한 마음이 솟아 우러러 보군 헌다.”라는 말에 땅을 대하는 아버지의 진심이 잘 드러난다. 땅으로 이해타산을 따지는 건 아버지와 아들이 이해타산을 따지며 서로 싸우는 것과 같다. 땅이 없으면 집이 없고 나라도 없다고 아버지는 말한다. 아버지에게 땅은 천지만물의 근거다. 땅을 가치로 따지면 천지만물도 가치로 따져야 한다. 물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이런 논리가 통용된다. 아버지는 땅으로 돈놀이를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땅이 돈놀이의 대상이 되어버리면 인간 또한 돈놀이의 대상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왜냐고? 땅은 천지만물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땅이 물건이 되면 인간 또한 물건이 된다. 물질문명이 팽배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땅과 인간이 모두 돈놀이의 대상이 된 상황을 떠올려 보라. 땅을 팔자는 아들을 향해 아버지는 땅을 파는 건 하늘을 파는 거와 다르지 않다고 거듭 강조한다. 하늘 아래 땅을 밟고 사는 인간이 하늘과 땅을 배신하고 살기는 힘들다. 하늘은 간혹 인간을 혹독한 지경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땅은 힘들 게 일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그만큼의 보답을 해준다. 아버지는 작인들한테 땅을 빌려주고 자기는 도회지에 나가 사는 지주들은 후레자식이나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한다. 땅의 마음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이익만 많이 빼내가려는 못된 심보를 지닌 지주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땅은 곧 돈이다. 돈독이 오른 지주들은 땅이 죽어가는 상황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작인들이 나서서 우는 소리를 하면, 그때야 애꿎은 비료만 땅에 털어 넣는다.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치고는 참으로 비열한 짓이다. 아버지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창섭이 모를 리 없다. 창섭은 그저 아버지 앞에서 손만 비빌 뿐이다. 땅을 돈 가치로만 따진 제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창섭은 그지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아버지는 죽을 임시에 땅을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팔 거라고 선언한다. 한몫의 돈을 받고 파는 것도 아니다. 몇몇 해고 그 땅에서 나오는 곡식을 팔아 연년이 갚아 나가게 할 거란다.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소유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을 아들이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자식의 열망을 채워주지 못하는 게 자못 섭섭하다. 하지만 아들의 욕망을 풀어주자고 땅의 마음을 저버릴 수는 없다. 아들을 보낸 자리에서 아버지는 생각한다. “그저 늘 보살펴야 하는 거다. 사람이란 하눌 밑에 사는 날까진 하로라도 천리(天理)에 방심을 해선 안 되는 거다……”라고. 천리(天理)는 하늘의 이치를 의미한다. 하늘은, 혹은 땅은 인간의 욕심을 어느 정도까지는 용납한다. 하지만 그 욕심이 도를 넘을 경우 하늘과 땅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화려한 물질문명에 푹 빠진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해 보라. 숨죽이고 있던 자연이 인간의 삶에 역습을 시작하고 있다. 인간이 만용을 부린다고 자연(하늘과 땅)을 이길 수는 없다. 이유는 참으로 간단하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 인간이 아무리 부정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바로 이것이다.
스타일리스트 상허 이태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은 20세기 한국 문학의 상징적 지표이다. 1930년대에 순수 문학단체이자 모더니즘 운동의 중심지로 평가받는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하여 활약한 이태준은, ‘시의 정지용, 소설의 이태준’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 근대문학의 형태적 완성을 이끈 인물이다. 그가 창작한 빼어난 작품들은 한국의 소설을 한 단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태준이 가지고 있던 단편과 장편에 대한, 그리고 소설 창작에 대한 장르적 인식은 1930년대 후반 [문장(文章)]지의 편집자로서 신인작가들을 등단시키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태준이 소설을 발표하던 당시부터 그의 소설에 대해 언급하는 논자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어휘 선택이나 문장 쓰기에 예민한 감각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고, 소설은 물론 수필에서도 단정하면서 현란한 수사를 구사하는 ‘스타일리스트’로 평가하였다.
1988년 해금 이후 이태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집적되었고 이태준 관련 서적들의 출판도 왕성하였다. 상허학회가 결성된 1992년 이후 전집 간행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되면서 1994년부터 순차적으로 전집이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여러 요인들로 인해 전집은 완간을 보지 못한 채 현재 절판과 유실 등으로 작품을 구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고, 이런 현실에서 상허학회는 우선 상허의 문학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만이라도 묶어서 간행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상허학회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간(旣刊) [이태준 전집](깊은샘)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체제와 내용을 새롭게 구성하여 총 7권으로 기획된 [이태준 전집](소명출판, 2015)을 출간하게 되었다.
2권 돌다리 외
간행사
*단편
까마귀
바다
장마
철로
복덕방
사막의 화원
패강냉(浿江冷)
영월 영감
아련(阿蓮)
농군
밤길
토끼 이야기
사냥
석양
무연(無緣)
돌다리
뒷방마님
제1호 선박의 삽화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부록
해설_조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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